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 (문단 편집) == 합스부르크 가문 및 교황과의 대립, 그리고 가문 통합 == 1317년 루트비히는 3년 전 경쟁자이자 외사촌인 프리드리히에게 표를 던진 형 루돌프에게 정치적인 보복으로 [[오버바이에른|상바이에른]]과 [[팔츠 선제후국|라인강변의 팔츠]] 지방의 지배권을 몰수했다. 이에 다시 한번 두 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나 1319년 루돌프와 1323년 형수인 나사우의 메히틸트, 1327년 조카이자 루돌프의 장남 아돌프가 사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1320년 뒤늦게 자신에게 표를 던져준 보헤미아의 국왕 얀에게 상라우지츠를 내주었다. 하나 이듬해(1321) 얀은 자기 가문의 여자를 루트비히의 사촌인 [[니더바이에른|하바이에른]] 공작 대 하인리히와 결혼시키고 방계 친척을 통해 에게클란트를 얻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결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 영향력 아래에 있던 [[아비뇽 유수|아비뇽의 교황]]조차 점차 루트비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322년 9월 22일 루트비히는 뮐도르프 전투에서 승리, 대립왕인 미남왕 프리드리히를 포로로 붙잡아 가장 긴박했던 문제인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을 대거 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하나 당시의 교황이였던 [[요한 22세]]는 교황으로서 이 분쟁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황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려 루트비히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년 후인 1323년 4월 4년 전에 아스카니아 가문[* [[안할트]]의 통치가문으로 당시에는 작센도 통치했다.]의 마지막 변경백 발데마르가 후계없이 죽어 그동안 미결정 상태로 놔둔 브란덴부르크를 아직 미성년자였던 큰 아들 루트비히에게 과감하게 넘겨주었고 그외에도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으로 [[마이센(독일)|마이센]]과 [[튀링겐]]을 통치하던 [[베틴 가문]]과 세습 동맹을 맺으면서 점차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1324년 2월 홀란드의 마르가레테와 2번째 결혼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